이타적 유전자

프롤로그

사회는 진화적 산물이다:

사회는 이성에 의해 고안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본성의 일부로서 진화되어 왔다. 사회는 인체와 마찬가지로 인간 유전자의 진화적 산물이다. —p17

제1장. 이기적 유전자의 이타적 사회

응집성:

지구상 최초의 생명체는 원자 수준의 개체였다. 이후 그것은 점차 응집되어 갔다. 응집이 시작되고부터 생존은 단식 경기가 아니라 팀 경기가 되어버렸다. … 응집은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이다. 개미와 산호는 지구의 상속자이다. 언젠가는 벌거숭이두더지쥐도 그들처럼 대규모 응집에 성공할 것이다. 응집은 도대체 어디까지 진행될 것인가? —p25,26

다양한 단위에서의 협동:

유전자는 협동해서 염색체를 만들고, 염색체는 협동해서 게놈이 되고, 게놈은 협동해서 세포를 형성하고, 세포는 협동해서 복합 세포를 이루고, 복합 세포는 협동해서 개체를 만들고, 개체는 협동해서 군체를 이룬다. 한 마리의 꿀벌 조차도 겉보기와는 달리 아주 높은 수준의 협동을 하며 산다. —p30

이기적 유전자 이론에 대한 오해와 거부감:

윌리엄 해밀턴의 저장을 읽은 사람에게 이 이론(이기적 유전자 이론)은 단순한 충격을 넘어선 비극이었다. 조지 R. 프라이스는 “이타주의는 단지 유전자의 이기성일 뿐이다”라는 해밀턴의 삭막한 결론을 뒤집기 위해 독학으로 유전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그는 엉뚱하게도 해밀턴의 이론이 논박의 여지없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고 말았다. 이후 두 사람은 공동 연구를 시작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지기 시작한 프라이스는 정신적 안정을 위해 종교에 귀의했다. 이윽고 전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뒤 그는 런던 시내의 쓸쓸한 폐가에서 자살하고 말았다. 그의 유품이라고는 해밀턴이 보내온 편지 몇 장 뿐이었다. …

전통주의적 위치에 서 있는 진화생물학자들, 예컨대 스티븐 제이 굴드나 리차드 르원틴 같은 학자들은 그것에 대항하는 장기적인 이론 투쟁에 골몰하게 되었다. 표트르 크로폿킨이 토머스 헉슬리에 대해 느꼈던 것처럼, 그들은 조지 윌리엄스나 윌리엄 해밀턴 일파가 세상의 모든 이타주의를 이기주의로 환원시키려 한다고 생각(곧 보게 되겠지만 실제로는 오해이다)했으며 그것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엥겔스의 말을 인용하자면, 그들의 이론은 자연의 풍요를 이기주의라는 차디찬 얼음물 속에 익사시키는 행위로 여겨졌다. —p33,34

이기적 유전자 이론은 오히려 전통적인 진화론보다 더 인간적(?)이다:

다윈과 토머스 헉슬리는 고전경제학자들을 이어받아 인간이 사리 추구에 입각해 행동한다는 전제에 모든 것을 꿰어 맞췄지만, 조지 윌리엄스와 윌리엄 해밀턴은 인간의 행동을 조종하는 좀 더 강한 동력, 즉 유전적 이익을 밝혀냄으로써 이타성이 끼여들 여지를 만들어주었다. 유전자는 이기적이지만 때로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개체의 이타성을 활용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들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이기적 유전자 이론 덕분에 개체의 이타주의를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p35

부모와 자식, 부부, 동료들 간의 관계도 상호 투쟁의 관계이다:

이기적 유전자 이론의 개척자인 윌리엄 해밀턴과 로버트 트리버스는 부모와 자식, 부부, 동료들 간의 관계는 상호 충족의 관계가 아니라 그 관계로부터 이익을 취하려는 상호 투쟁의 관계라고 주장한다. …

1993년 말 David Addison Haig는 이 발상을 자궁 속까지 확장했다. …

헤이그에 따르면 그것은 영양 공급원인 모체 혈액의 혈당량을 증가시키려는 욕심 많은 태아와 소중한 혈당을 태아에게 너무 많이 빼앗기지 않으려는 알뜰한 모체 사이의 줄다리기 싸움이다. 이 짧지만 숨가쁜 싸움의 결과로 일부 여성들은 임신성 당뇨에 걸리게 된다. 임신성 당뇨는 태아가 줄다리기에서 너무 많이 이겨서 나타나는 결과이다. 그뿐만 아니라 태아가 생산하는 Human placental lactogen 호르몬은 아버지 쪽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에 의해 생산된다. 태아는 마치 모체 내에 심어진 아버지의 기생체 같다. —p38-40

제2장. 노동의 분화

제3장. 죄수의 딜레마

열대 우림도 죄수의 딜레마의 결과이다:

이상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열대 우림도 죄수의 딜레마에 따른 결과이다. 우림에서 자라는 나무들은 에너지의 대부분을 본연의 목적인 생식이 아니라 하늘을 향해 위로 뻗어나가는 데 소모한다. 만일 그들이 서로 가지뻗기를 금지하고 키를 3미터 쯤으로 제한하는 협정을 맺는다면 모두에게 이익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럴 수 없다. —p84

게임 이론에서 전략을 행하는 개체가 자신의 전략을 이해하고 있음을 반드시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현학적인 게임이론가가 나타나기를 기대하면서 물고기를 들여다보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게임 이론에서는 물고기가 자신이 하는 행동을 이해하는 것이 전제될 필요가 없다. 전혀 의식이 없는 자동 인형일지라도 다른 자동인형과 함께 죄수의 딜레마적인 상황 속에서 반복적으로 상호 작용을 하는 조건이라면 호혜주의로 진화할 수 있다. 컴퓨터 모의 실험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전략을 실천하는 주체는 그 물고기가 아니라 전략을 물고기에게 프로그래밍할 수 있는 진화이다. —p116

제4장. 비둘기와 매의 구별

큰 뇌와 사회성의 상관관계:

육상 포유 동물 중에서 가장 영리한 영장류를 비롯한 육식 동물들을 살펴보면, 뇌의 크기와 사회집단의 규모 사이에 밀접한 상관 관계가 발견된다. 이루고 사는 사회가 클수록 뇌 전체에서 신피질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다. 복잡한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큰 뇌가 필요하다. 반대로 큰 뇌를 갖기 위해서는 복잡한 사회에서 살아야 한다. 두 가지 진술 모두 옳으며 그만큼 상관도도 높다. —p101

상대방의 신뢰도를 예측하는 능력:

잠재적 이타주의자들 간의 분별은 꼭 과거 행동의 자료를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게임의 진행 과정에서 잠재적 배반자를 알아내고 그를 회피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경제학자 로버트 프랭크의 실험을 보자. 그는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30분간 같은 방에 머물게 한 뒤 한 사람씩 불러내서, 단판 승부인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한다면 누가 배반을 하고 누가 협력할지를 점쳐 보도록 요구했다. 실제로 확인한 결과 그들은 확률적으로 유의미한 정도를 훨씬 뛰어넘는 상당히 정확한 예측을 했음이 밝혀졌다. 인간은 단 30분의 만남으로도 상대편의 신뢰도를 예측할 수 있다. —p119, 120

제5장. 노동과 만찬

성생활과 식생활의 본능적 차이:

지금의 우리 모습과는 달리 성생활은 여러 사람이참여하는 공개적 활동이고, 식생활이 은밀한 사적 활동이었다면 어땠을까? 세상이 이런 식으로 되지 말아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 성생활을 숨어서 해야 하고 남들에게 들키면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인간의 본성 외에는 달리 설명할 근거가 없다. …

성적 프라이버시가 중세 기독교의 문화적 발명품이라는 엉뚱한 발상은 아직도 많은 역사학자들이 곧잘 인용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미 오래전에 부정된 생각이다. —p125

제6장. 공적 자산과 개인적 선물

투창기 발명의 사회적 의미:

인간이 열렬한 매머드 사냥꾼이 된 것은 투창기의 발명 덕분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사회적 의미를 갖는다. 매머드처럼 큰 짐승에게서는 대규모 집단의 인간이 나눠먹기에 충분한 양의 고기가 나온다. 아니 너무 크기 때문에 나눠먹는 것이 필수이다. 이렇게 되면 고기는 잡은 사람의 사유 재산이 아니라 공공 재산이며 집단의 공동 소유물이다. 큰 짐승 사냥은 분배를 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분배를 강요한다. 매머드 고기를 나눠달라고 요구하는 굶주린 이웃을 거절하려면 그 사람이 투창기로 무장했을 때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큰 짐승 사냥은 인류에게 처음으로 공공재의 개념을 알려주었다. —p154

선물과 뇌물 간에는 큰 차이가 없다:

어느 한 시점을 잡아 조사해보면, 영국 전체 경제의 7-8%는 선물용 상품을 생산하는데 투여된다. 일본의 경우에는 수치가 이것보다 높을 것이다. 선물 시장은 경기 침체를 거의 모르는 시장이다. 최근 수십 년 간 냉장고나 요리 도구 제조업체들이 결혼 또는 크리스마스 시장에 좌우되는 토스터나 커피메이커 제조에 뛰어든 이유도 이것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서로에게 선물을 주는가? 그것은 한편으로는 상대에게 호의를 베풀기 위한 것이도 다른 한편으로는 아량이 있는 사람이라는 평판을 지키기 위한 것이며, 또다른 한편으로는 선물을 받는 사람을 보답이라는 의무감에 묶어놓기 위한 것이다. 선물과 뇌물 간에는 큰 차이가 없다. —p168

제7장. 인간의 도덕성

웨이슨 선택 과제:

사람들은 특정한 상황의 웨이슨 선택 과제 - 예컨대 추상적 논리로 하는 상황 - 는 잘 풀지 못하고, 다른 특정 상황의 과제는 아주 잘 푼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사회 구성원들에게 감시되어야 할 모종의 사회 계약 형태로 수수께끼가 제시될 경우에는 사회적 배경이 아주 낯설고 생소하더라도 사람들은 문제를 쉽게 풀어내는 경향이 있다. …

어떤 형식을 빌리든 간에 피검자들이 가장 쉽게 풀어내는 문제는 사회 계약을 위반하는 사기꾼 -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이득을 얻으려는 - 을 찾아내라는 문제이다. 인간은 사기꾼을 찾아내는 데는 아주 익숙하고 이타주의자를 찾아내는데는 완전히 무능하다. 한 학생이 에콰도르의 아쿠아르족을 상대로 WasonTest를 해보았지만, 이 원주민들 역시 사회 계약의 위반자를 발견하는 데 훨씬 뛰어난 감각을 보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웨이슨 선택 과제는 인간의 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인정머리 없고 지독스러울 정도로 이해 타산에 집중되어 있는 기계 장치의 전원을 켜는 것으로 보인다. 이 장치는 뇌 속에 입력되어 있는 모든 문제를 두 사람 간의 사회 계약 문제로 인식하고, 그 계약을 위반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감시할 방법을 찾는다. 그것은 일종의 거래를 담당하는 신체 기관이라 짐작된다. …

특정 부위의 뇌 손상을 입은 뒤에 오직 사회적 거래 관계에 대한 판단 능력만을 상실한 환자들이 있다. 반대로 모든 지능 검사가 비정상인데, 사회적 거래에 관한 판단 능력만 정상을 보이는 환자 - 대부분 정신분열증 환자 - 들이 있다. 다소 정확한 표현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인간이라는 동물의 뇌 속에는 거래를 담당하는 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혀 딴 세상 이야기 같은 이 생각이 최근에는 신경학적 발견을 통해 이미 상당 부분 지지받고 있다. —p181-184

모든 이타주의는 이기주의이다:

생물학계에 유전자 중심적 냉소주의를 퍼뜨린 주인공인 로버트 트리버스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자연선택 이론으로부터 이타주의적 행동을 설명하려는 모델은 이타주의로부터 결국 이타주의를 제거하도록 예정되어 있는 모델이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호의를 베푸는 동기가 그 행위로 당신의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라면 당신은 이타적인 것이 아니라 이기적인 것이라는 식의 이 같은 발상은 18세기의 Glasgow 철학자들이나 Amartya Sen 같은 현대 경제학자를 비롯한 사회과학자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발상이다. …

우리가 흔히 미덕이라고 지칭하는 것들이 사실은 사리 추구의 한 형태일 뿐이라고 Michael Ghiselin은 말했다.

기독교인들이라고 해서 특별히 우월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그들은 천국에 들어가려면 선행을 하라고 가르친다. 천국이란 그들의 이기성을 움직이기에 충분한 뇌물이다. —p187

죄책감의 기능 (ToDo)

이타주의 성향 광고:

사람들은 대게 헌혈 행위를 비밀로 감추지는 않는다. 헌혈이나 르완다에서의 봉사는 베풀 줄 아는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게 해주고, 죄수의 딜레마에 처했을 때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믿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당신은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타주의자이다. 나를 믿어라.” —p195

감정에 관한한 정직이 최선의 전략이다:

인간은 상대방의 신뢰도를 예측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처음 만난 사람이 짓는 미소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미소는 그 사람이 나를 신뢰하기를 또는 나에게 신뢰받기를 바란다는 단서이다. 물론 그것은 거짓 미소일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은 위선적 미소와 진정한 미소를 구별할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기분이 나쁜데도 천역덕스럽게 웃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색한 상황에서 낯이 붉어지는 것은 거의 불수의적인 반응이다. 인간의 얼굴과 행동은 인간의 머릿속에서 돌아가는 계산을 숨김없이 폭로해 버리므로 몸의 주인인 당사자에게는 매우 불충실한 하인이다. 부정직은 생리적 현상을 일으켜 거짓말탐지기 같은 기계도 속이지 못한다. …

이렇게 쉽게 탄로나는 인간의 감정은 사회 속에서 신뢰가 유지도리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종에게는 명백히이익이지만 개인에게는 어떤 유용성이 있는가? 3장에서 배신자들로 들끓는 세계에 들어간 팃포탯 전략은 자기와 비슷한 전략을 구사하는 협력자를 만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신과 자기 안면 근육을 속이는 데 익숙하여 거짓말에 능숙한 사람들의 세계에서 자기 기만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은 늘 당하게 마련이라는 것이 로버트 프랭크의 생각이다. … 감정에 관한 한 정직이야말로 최선의 전략이라는 것이다. —p196-197

최후통첩 게임:

Adam은 현금 100 파운드를 받고 그 돈을 Bob와 나눠가지라는 명령을 받았다. Adam은 Bob에게 얼마를 나눠줄지 제안해야 하는데, 이때 Bob이 Adam의 제안을 거절하면 두 사람 다 한 푼도 가질 수 없다. Bob이 Adam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제안한대로 분배가 된다. …

사람들이 Adam의 역할을 맡았을 때 가장 보편적으로 제안하는 액수는 50 파운드이다. … 인간은 자기 이익을 주로 생각하지만 공평성에 대해서도 많은 배려를 한다. … 그까짓 50 파운드를 위해 평판을 더럽힐 것인가?

그러나 사실 우리가 이 게임에서 관찰한 것은 공평성이 아니다. (See Dictator game)

감정은 헌신성을 보장하기 위한 정신적 도구:

James Wilson은 도덕성이란 일련의 목적 지향적인 본능이며 감정 위이에 자리한다는 제안을 철학자들이 진지하게 고찰해보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철학자들은 도덕성이란 사회에 의해 사람들 위에 세워진 실용적인 또는 작위적인 일련의 속성이자 관습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에 대해 윌슨은 도덕성이 육욕이나 탐욕처럼 감성에 속하는 것이며 관습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어떤 사람이 부정이나 학대를 목격하고 진저리를 치는 이유는, 그가 감성의 효용성을 합리적으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본능에 이끌리기 때문이다. …

심리학자들은 감정이 헌신성을 보장하는 정신적 도구라는 프랭크(누구? AnswerMe)의 주장에 서서히 동조해가고 있다. 그러나 보다 확실한 증거는 손상된 두뇌에 관한 연구에서 관찰된다. 인간은 전두엽 앞쪽의 어떤 작은 부위(어디? AnswerMe)를 다치면 이른바 합리적인 바보가 된다. 이 부위를 다친 사람들은 겉보기에는 정상이다. 마비나 언어 장애, 감각 상실, 기억력 저하, 일반 지능의 저하 같은 현상은 나타나지 않는다. 심리학 검사 결과도 뇌를 다치기 전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이상하게도 완전히 주위로부터 고립된 생활을 하는데, 그 이유는 신경과적인 문제보다는 정신과적인 문제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그릇된 이분법이다!). 그들은 직장을 유지하지 못하고 자기 제어력을 상실하며 활동 불능 상태에 빠질 정도로 우유부단해진다. …

그들은 문자 그대로 감정을 상실한다. 불행한 일을 미소로 맞이하며 기쁜 일이나 참담한 좌절을 겪고도 마음의 동요가 없다. 그들은 감정적으로 완전히 밋밋하다.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데카르트의 오류에서 이런 증상을 보이는 환자 열 두 명의 증례를 분석한 뒤, 의사 결정 능력의 상실과 감정의 상실이 함께 오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환자들은 그들 앞에 놓인 모든 사실을 냉혈 동물처럼 합리적으로 저울질하기 때문에 아무런 결단도 내릴 수 없는 것이다. 이성의 감소에 못지 않게 감정의 감소도 비합리적 행위의 중요한 원천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인간은 감정이 없으면 합리적 바보가 된다. …

미덕은 우리 본성의 일부이고 본능이며 아주 유용한 윤활제이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의 이기성을 최소화하기 위한 제도를 만들어내려고 할 것이 아니라, 인간의 미덕을 계발하기 위한 제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p203-205

제8장. 협동과 전쟁

협동은 이기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진화되었다:

협동은 원래 미덕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기적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쓰였다. 우리는 기이할 정도로 협동에 집착하는 인간 사회의 본성을 찬양하기 전에 그 본성이 무어으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것은 비비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종류의 원숭이 사회에서 협동은 오로지 경쟁과 공격행위를 위한 것이다. 수컷 원숭이에게 협동이란 싸움에 이기는 수단이다. 원숭이들이 협동하고 연대하는 모습을 관찰하려면 그들이 서로 싸울 때를 기다리는 것이 가장 확실하다. —p215

모든 종은 독특하다.

물론 인간은 독특하다. 그러나 독특하다는 사실 자체는 전혀 독특한 것이 아니다. 모든 종은 그 나름의 독특한 길을 가지고 있다. —p221

[!memo] 한편, “All species are unique, but humans are uniquest” —Theodosius Dobzhansky

약점을 직시하기:

내가 독자에게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탈을 벗고 인간이라는 생물학적 종이 갖고 있는 약점을 직시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인간이 반드시 부족주의적이라는 법은 없으며, 인간 사회의 정치도 반드시 지금 같은 식으로 되라는 법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인간이 돌고래와 같은 개방 사회를 이루고 살아왔다 하더라도 공격, 폭력, 연합, 정치 따위가 없었을 리는 없겠지만, 적어도 인간 세계는 현재와 같은 집단들의 모자이크 그림이 아니라 수채화가 되기는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민족주의나 국경, 집단 안팎의 차별, 전쟁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것들은 모두 부족주의적 사고 방식의 산물이며, 이 부족주의적 사고 방식은 집단을 만들고 연합을 형성하며 살아온 유인원의 진화적 유산이다. 코끼리의 사회에는 폐쇄성이 없다. 암컷 코끼리들이 모여 집단을 형성하지만 이들 집단은 서로 경쟁적이거나 적대적이지도 않으며 세력권도 없고 구성원이 일정하지도 않다. 코끼리들은 집단과 집단 사이를 자유롭게 오간다. 인간이 그런 식으로 사는 모습을 상상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사실 여성들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p238

제9장. 투쟁하는 개체들의 화합

집단선택설 비판:

염색체와 배아와 Ant colony이 가르쳐준 교훈을 되새겨보자. 이처럼 긴밀한 친족 집단에도 이기적 반란의 위협은 상존한다. 때문에 염색체에서는 추첨, 배아에서는 생식세포계 격리, 일개미에서는 생식 능력의 제거와 같은 정교한 메커니즘을 통해 반란은 억제된다. 하물며 집단을 구성하는 개체들이 혈연적으로 무관하고 개체들이 한 집단에서 다른 집단으로 옮겨다니며 저마다 재생산 능력을 갖고 있는 경우에 이기적 반란을 억제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바로 이 논리에 따라 집단선택 이론의 허약한 전제는 여지없이 무너진다. 집단 선택이 개체 선택의 효과를 압도할 수 있으려면, 집단이 개체만큼 짧은 세대를 가져야 하고 아주 공정하게 동종 교배되어야 하며, 게다가 집단 간의 이동이 거의 없고 집단의 도태율이 개체의 도태율만큼 높다는 조건이 모두 동시에 충족되어야만 한다. 어떤 종족 또는 어떤 집단이 아무리 대의를 내세우면서 이기적 욕망의 절제를 시도한다고 해도 이들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집단 내에는 이기주의가 독감처럼 번질 것이다. 개체는 집단의 절제를 틈타 야심을 충족시킬 기회를 끊임없이 노린다. —p249-250

순응성의 진화:

로버트 보이드와 피터 리처슨은 인간의 협동을 설명하는 데 호혜성만으로는 불충분하므로 다른 설명을 찾아보자고 제안했다. … 보이드와 리처슨은 수학적 시뮬레이션을 통해 협동을 더 가능하게 하는 문화적 학습 방식을 발견했다. 그것은 순응주의이다. 아이들이 부모를 본받거나 스스로의 시행착오로 학습하지 않고 성인 롤모델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전통이나 유행을 모방함으로써 학습한다고 한다면, 그리고 성인들은 그 사회의 가장 보편적 행동 패턴을 따른다고 한다면 협동은 아주 큰 집단 속에서도 유지될 수 있다. 개체 간의 선택만큼이나 집단 간의 선택이 중요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

순응주의라는 말이 낯설게 느껴지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아주 우스꽝스럽고 위험한 길을 단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간다는 이유만으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쉽게 따라간다.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 판단을 포기하고 일종의 정신병자의 길을 택했다. 마오쩌둥 시대의 중국에서 사디스트적인 지도자의 선언 몇 개에 따라 전 인구가 학교 선생들을 탄핵 공격하고 솥을 녹여 무쇠를 만들고 참새를 몰살시키는 식의 우스꽝스런 일에 참여했다. 이것들은 모두 극단적인 예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신이 살고 있는 사회가 광기와 무관하다고 안심하지는 말기를 바란다. 제국주의적 전쟁 옹호론, 매카시즘, 비틀즈 광신, 나팔바지, 그리고 정치 캠페인 같은 것을 보면 인간이 단지 유행이라는 이유만으로 얼마나 쉽게 그것을 따르는지를 알 수 있다. …

보이드와 리처슨은 그렇다면 순응주의가 애당초 어떻게 생겨났을까에 의문을 가졌다. 순응주의자가 되는 것은 인간에게 어떤 이익을 주는가? 인간처럼 아주 다양한 생존 방식을 갖고 있는 동물종에게는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전통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는 것이 그들의 해답이다. …

한편 보이드는 기왕 모방을 하려면 되도록 많은 사람이 모방하는 행위를 따라하는 편이 더 큰 이익이 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누군가의 행위를 나 혼자만 모방한다면 그 행위는 그가 혼자 힘으로 애써 습득한 것에 지나지 않을 뿐, 다른 수백 또는 수천 명의 경험을 통해 입증된 안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지역 특성화의 습성, 문화적 순응주의, 집단 간의 강렬한 적대감, 협동적인 집단 수호, 집단 이기주의 등은 따로따로가 아니라 함께 더불어 발전해 온 것으로 보인다. 협동을 잘하는 집단은 으레 번성했고, 그에 따라 협동적 관습은 조금씩 인간의 정신 세계 깊숙이 자리를 잡아갔다. 보이드와 리처슨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 인간이 왜 다른 동물들과 달리 자기 이익을 억누르고 낯선 사람들과 협동을 하는지에 관해서, 순응주의적 전승 이론은 이론적으로 설득력이 있을 뿐 아니라 경험적으로도 타당한 설명”이다. —p252-255

제10장. 비교 우위의 법칙

교역을 비롯한 각종 경재행위는 고대에도 존재했다:

… 상업은 현대의 발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르크스나 막스 베버의 주장은 이와 다르지만 교역에서 이득을 얻는다는 단순한 생각은 자본의 힘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었으며 현대나 고대를 막론하고 경제의 핵심이었다. 부란 교역을 통한 노동의 분화이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르도가 태어나기 수천 년 전에 이미 인류는 이 사실을 발견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 수렵채집인들은 교역, 전문화, 노동의 분화, 그리고 정교한 물물 교환 체제를 이미 삶의 일부로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그것들은 수백 또는 수천 년 전부터 계속되어 온 것일 것이다. 어쩌면 수백만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140만 년 전의 직립 원인조차 전문화된 채석장에서 수출을 위해 돌 도구를 생산했을 가능성이 있다. …

교역은 근대의 발명품이 아니다. —p276-277

교역은 법률에 앞서 존재했다:

교역이 법률보다 앞서 존재했다고 한다면, 철학이라는 카드로 지은 장난감 집은 붕괴될 위험에 처하고 말 것이다. 제레미 벤담은 이렇게 말했다. “법률이 존재하기 전에 소유권이란 없었다. 법률을 제거해버리면 모든 소유권은 무효가 된다”. 정부는 수수방관하고 있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철저한 자유무역주의자들조차 상인들 간에 이루어지는 계약의 이행을 정부가 강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법률에의 호소와 정부의 보호가 없다면 상거래는 곧바로 붕괴되어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정부나 법률, 사법, 정치는 교역보다 훨씬 뒤에 생겨난 것일 뿐더러 그것들은 교역이 인도하는 길을 뒤따랐다. 수렵채집인 사회가 그랬듯이 중세 상인들의 경우에도 이것은 마찬가지였다. 근대의 상거래법은 정부가 아니라 상인들 자신이 만들었고 그것에 구속되었다. 정부가 한 일은 그것을 받아들인 것 뿐이었는데, 그 결과는 오히려 참담했다. p280

비교 우위:

집단간에 비교 우위의 법칙을 활용하면서 살아가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다. 개미나 벌거숭이두더지쥐, 휘아새들도 집단 내부에서는 아주 훌륭한 노동 분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집단 사이의 노동 분화는 없다. 데이비드 리카르도가 한 일은 우리 조상들이 아주 오래전에 발명한 것을 설명해 낸 것일 뿐이다. 비교 우위의 법칙은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생태학적인 비장의 무기 가운데 하나이다. —p291

제11장. 공존의 생태학

원주민에 대한 감상주의:

당연히 객관적이라고 간주되는 TV 프로그램들이 늘 보여주고 있듯이, 인간은 대자연의 엄연한 실상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연의 실상을 멋대로 왜고하고, 실낱 같은 단서라도 붙잡으면(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는 돌고래, 죽은 가족을 애도하는 코끼리) 동물의 미덕을 추켜주려고 혈안이 되며, 동물의 잔혹성은 인간이 가져온 일탈 행동이라고 변호해 주기에 급급하다. 최근 스코틀랜드 연안에서 돌고래들이 참고래들을 공격하는 모습이 관찰되었을 때, 동물 “전문가들”은 이 일탈 행동을 뭔지는 모르지만 어떤 공해의 탓으로 돌렸는데, 결국 그들은 그에 관한 증거는 아무것도 없음을 시인했다. 우리는 자연의 부정적 측면을 외면하고 긍정적 측면에 대해서는 감상에 빠진다. 고상한 야만인의 신화가 사라지지 않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원주민에 대해서도 우리는 위선적 감상주의를 드러낸다. 장-자크 루소의 시대에 고상한 야만인 신화는 사회적 미덕에 관한 것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생태론적 형식을 취한다. … 인디언은 자연과 하나였고 자연을 숭배했으며 불가사의할 정도로 자연과 깊게 감응했을 뿐 아니라, 사냥을 하면서도 사냥감인 동물 종 자체에는 해를 입히지 않도록 철저한 절제의 규칙을 준수했다는 것이 일반적 생각이다. 그러나 유적 조사의 결과는 이 같은 희망적인 신화에 의문을 던진다. 이리는 늙거나 아주 어린 짐승만 잡아먹지만, 인디언이 사냥한 엘크는 대부분 한창 때의 것들이다. 인디언은 황소보다는 암소를 더 많이 잡았고, 오늘날만큼의 수명을 유진할 엘크는 당시 거의 없었다. 생태학자 찰스 케이는 북아메리카 원주민이 큰 짐승을 보호했다는 증거가 전혀 없다고 결론내렸다. —p298-301

아마존 인디언들이 사냥감의 과잉 도살을 예방하기 위해 사냥 패턴을 체계적으로 자제한다는 증거를 찾아내려는 연구는 이제까지 네 차례나 있었다. 그러나 네 가지 연구 모두에서 희망적 가설은 부정되었다. RayHames는 야노마모족과 예콰나족은 사냥감이 많은 지역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것을 발견했다. 사냥감이 많은 지역은 으레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사냥 지역까지 가기 위해서는 고갈 지역을 거쳐야 한다. 그들이 환경 보호를 실천한다면 고갈 지역을 지나는 동안 만나는 사냥감은 모르는 체 지나쳐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잡을 가치가 있을 만큼 큰 사냥감이고 그들 손에 무기가 있는 이상 늘 예외 없이 고갈 지역에서 만난 사냥감을 놓치지 않았다. —p309

인간에 의한 석기시대의 대멸종: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뒤 인류의 조상들이 지구를 가로질러 새로운 땅을 개척하면서 자연에 대해 저지른 유린 행위가 요즘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1만 1,500년 전 북아메리카에 인간이 처음 발을 내디딘 바로 그 시기에 대형 포유 동물의 73%가 짧은 기간 동안에 사라져 버렸다. 사라진 것은 자이언트 바이슨, 야생마, 단두곰, 매머드, 마스토돈, 검상송곳니고양이, 나무늘보, 야생낙타 등이다. 8,000년 전에는 남아메리카의 대형 포유 동물의 80%가 사라졌다. 나무늘보와 자이언트 아르마딜로, 과나코, 자이언트 캐피바라, 말만큼 큰 개미핥기 등이다.

이것이 이른바 홍적세의 대량 살육이다. 감상주의자들은 아직도 동물들을 해친 것은 인간이 아니라 기후 변화이며, 인간이 한 일은 어차피 사라져 가는 동물들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한 것뿐이라고 주장한다. 기후 변화에 책임을 돌림으로써 면죄를 받으려는 소망이 이토록 강하게 남아있다는 것이 오히려 인상적이다. 그러나 인간이 처음 발을 내디딘 시기와 멸종의 시기가 정확히 일치하고, 빙하기가 시작되기 전이나 끝난 후에도 기후 변화는 여러 차례 있었고, 이상하게도 멸종된 동물들에게 공통점 - 큰 짐승들만 사라졌다 - 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인간이 죄를 면하기는 어렵다. —p302

환경 파괴는 죄수의 딜레마에 의해 일어난다:

우리는 왜 환경을 파괴하는 것일까? 대답은 별다른 것이 아니다. 환경 파괴는 일종의 죄수의 딜레마에 의해 일어난다. 게임 참가자가 두 사람이 아니라 여럿이라는 점만 다르다. 죄수의 딜레마에 따르는 숙제는 두 명의 이기주의자가 더 큰 이익을 위해 협동하면서 상대편의 희생 위에 이익을 얻으려는 유혹을 회피하는 것이다. 환경 보존의 문제는 이와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다. 이기주의자들이 공해와 쓰레기를 배출해 다른 선량한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것을 어떻게 방지할 것인가? 어떤 사람이 자제를 실천하면 그는 몰상식한 다른 사람의 손에 놀아나는 것밖에 안된다. 나의 인내는 너에게 기회가 된다. 이것은 게임 참가자가 두 사람이 아니어서 게임이 더 힘들다는 점만 뺀다면 죄수의 딜레마와 똑같은 상황이다. —p312

공유지의 비극:

… 결론은 리바이어던이 없어도 환경의 보존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 Elinor Ostrom과 그의 동료들은 하나의 실험을 계획했다. 그들은 학생 자원자 여덟 명을 모아 각자에게 스물 다섯 개의 쿠폰을 나눠주었다. 쿠폰은 실험이 끝나는 두 시간 뒤에는 현금으로 교환해준다. 그 동안에 학생들은 그 쿠폰을 사용해 컴퓨터 상에 만들어진 두 곳의 시장에 익명으로 투자를 할 수 있다. 제1시장에서는 고정 비율 수익, 즉 투자된 쿠폰과 동일한 양의 이익이 남는다. 제2시장은 실험 대상자 여덟 명이 투자한 총량에 비례해 수익을 남겨준다. 즉 투자된 쿠폰의 숫자가 적을수록 수익은 커서 제1시장의 고정수익보다 이익이 크다. 그러나 투자된 쿠폰이 많을수록 수익은 줄어들어 일정 기준을 넘어서면 오히려 손해를 보는 일이 생긴다.

이 실험 상황은 어업이나 목축처럼 모두에게 개방된 환경 자원의 문제를 본따 설계된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자제를 실천하면 좋은 보답이 돌아오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이익을 얻는 것은 남들이 자제를 할 때 혼자서만 자제를 하지 않는 사람(무임승차자)이다. 학생들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했을까? 가장 단순한 형태로 진행된 첫번째 실험에서 두 시간에 걸친 익명의 투자 결과는 다름 아닌 공유지의 비극이었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벌 수 있었던 금액의 21%만을 챙겼다. 두번째 실험에서는 실험도중 학생들에게 단 한 차례 토론의 기회를 주었다. 토론 후 그들은 다시 익명의 투자자로 돌아갔다. 한 차례의 토론이 도움이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 수익은 최대 가능 수익의 55% 까지 늘어났다. 다음에는 학생들에게 여러 차례 토론의 기회를 주자 수익은 73% 까지 늘어났다. 무임승차자에 대한 제재 장치 없이 단지 토론하는 것 만으로도 비극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에는 실험 대상자들에게 무임승차자를 벌금형으로 제재할 기회를 주고 대신에 전략을 논의하기 위한 토론 시간을 주지 않자 수익은 다시 최대 가능 수익의 37%로 떨어졌다. 벌금형을 집행하는 데 쓰인 조세 비용을 제하고 나면 겨우 9%가 실질 수익이었다. 그들에게 다시 토론의 기회를 주고 그들 스스로 무임승차자에 대한 제재 방법을 세우도록 하자 시스템은 거의 완벽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이를 통해 최대 가능 수익의 93% 까지 수익률을 높인 경우도 있었다. 그들은 제2시장에 대한 각자의 투자 하계를 정했으며 4%만이 이 약속을 어겼다.

환경 문제에 대한 자제를 실천하는 데 의사 소통만으로도 상황이 크게 개선될 수 있다는 것이 오스트롬의 결론이다. 의사 소통이 처벌보다 더 중요했다. 칼이 없는 서약은 지켜지지만, 서약이 없는 칼은 효력이 없다. 알겠는가? 홉스주의자들이여, 그리고 강제를 옹호하는 하딘이여. —p331-332

제12장. 소유와 분배

소유권의 마력:

어떤 사람에게 자갈밭의 소유권을 부여해 보라. 그는 곧 그곳을 정원으로 바꿔놓을 것이다. 같은 사람에게 그 정원을 9년간 임대해보라. 그는 그곳을 사막으로 바꿔놓을 것이다. 소유권이라는 마력은 모래를 황금으로 변화시킨다. —“아서 영의 여행기”에서. —p316

제13장.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많은 문화적 관습들은 인간의 본성에 기반한다:

진화라는 관점에서 인간을 논한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내가 이 책을 통해 의도한 것은 인간이 몇몇 문화적 관습을 언제 확득했는지에 관한 신화들을 깨려고 한 것뿐이다. 나의 주장은 교회가 존재하기 전에 도덕이 있었고, 국가각 존재하기 전에 무역이, 화폐가 존재하기 전에 거래가, 홉스 이전에 사회계약이, 인권 이전에 복지가, 바빌론 시대 이전에 문화가, 그리스 문명 이전에 사회가, 아담 스미스 이전에 사리추구가, 자본주의 이전에 탐욕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홍적세의 수렵채집인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인간 본성의 표현이다. 그중 어떤 것들은 다른 영장류와 인류를 잇는 읽어버린 고리에까지 그 뿌리가 닿는다. 인류의 부질없는 우월감과 자존심이 이 같은 사실을 여태 무시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자기도취는 미성숙의 표현이다. —p344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사회 질서가 생겨났다고 믿었다. 홉스는 전제군주로부터, 장-자크 루소는 은둔자로부터, 그리고 레닌은 당으로부터 사회 질서가 생겨난다고 믿었다. 그들은 모두 틀렸다. 사회 질서의 뿌리는 우리 인간의 머릿속에 있다. 인간의 머릿속에 완전한 조화와 미덕의 사회를 실현할 본능적인 능력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보다 나은 사회를 실현할 능력은 존재한다.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제도는 이 같은 본능을 이끌어낼 수 있는 그런 제도이다. 다시 말해 평등한 개인들 사이에 교환을 조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들 간에 우정을 쌓기 위한 최선의 처방이 교역이듯이, 해방되어 권력을 회복한 개인들 간에 협동을 조장하는 최선의 처방은 거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평등한 개인 간의 사회적, 물질적 거래를 조장해야 한다. 신뢰는 거래를 통해 획득되고, 또한 신뢰는 미덕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p366

다윈의 지적 계보, 경제학과 생물학의 연결고리:

홉스는 다윈의 지적인 직계 조상이다. 홉스(1651)는 흄(1739)을, 흄은 애덤 스미스(1776)를, 애덤 스미스는 맬서스(1798)를, 맬서스는 다윈(1895)을 낳았다. 다윈이 1세기 전에 애덤 스미스가 밟은 전철을 따라 집단 간의 경쟁에서 개체간의 경쟁으로 사고의 중심을 바꾼 것은 맬서스의 글을 읽고 난 뒤의 일이다.

홉스의 진단 - 처방은 없지만 - 은 아직까지도 경제학과 현대 진화생물학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애덤 스미스는 밀턴 프리드먼을 낳았고, 다윈리차드 도킨스를 낳았다). 이 두 분야는 자연의 평형이라는 것이 위로부터 설계되어 주어진 것이 아니라 밑으로부터 형성되어 올라온 것이라고 한다면 총체적인 조화는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바탕에 깔고 있다. 케인즈는 “종의 기원은 데이비드 리카르도의 경제학을 과학적 용어로 번안한 것”이라고 보았으며, 스티븐 제이 굴드는 “자연선택이란 애덤 스미스의 경제학을 자연에 적용한 것”이라고 보았다. 마르크스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그는 1862년 6월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다윈은 어떻게 동물과 식물의 세계에서 그가 살고 있는 영국 사회와 그 요소, 즉 노동의 분화, 경쟁, 새로운 시장의 개척, 발명, 생존을 위한 맬서스적인 투쟁을 인식할 수 있었을까? 이것은 바로 홉스가 말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다.” —p347-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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